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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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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왕권 강화와 개혁 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1794년에 착공하여 1796년에 완공한 성곽이다. 정치, 군사적 요충지이자 경제적 자립 도시를 목표로 건설되었으며,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 등 당시의 과학 기술이 활용되었다. 10권으로 구성된 축성 기록인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축성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으며, 한국전쟁으로 일부 훼손되었으나 1970년대에 복원되었다. 현재는 주요 시설과 함께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관광 명소로, 1795년 정조의 8일간의 행차를 기록한 화성행행도 병풍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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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한국어 이름수원 화성
한자 이름水原華城
로마자 표기Hwaseong
위치수원시, 경기도, 대한민국
유네스코 세계 유산 ID817
유네스코 등재 연도1997년
웹사이트수원문화재단
문화재 지정번호사적 제3호
면적411,534m²
세계유산 정보
등재 기준(ii), (iii)
건축 및 역사
시대조선 정조 20년 (1796년)
관리수원시
기타 정보
링크문화재청

2. 역사

18세기 말,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융건릉(현륭원)으로 옮기고, 그 주변에 성벽, 탑, 누각, 성문을 쌓아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 이것이 수원 화성의 시작이다.[27]

수원 화성은 노론을 배척하고 실학을 중시한 정조의 이상적인 도시였으며, 한때 화성으로 천도를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원 화성 완공 직후 정조가 승하하여 천도는 무산되었다.

1794년부터 1796년까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37만 명의 노력을 투입하여 수원 화성을 건설했다. 성벽의 길이는 5km가 넘으며, 중국에서 전래된 서양 건축 기술을 도입하여 성곽 축조에 돌과 벽돌을 함께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동양과 서양의 기술을 융합하여 설계했다.[2] 이는 당시 조선의 축성 기술과 건축 미술의 정수를 집대성한 것이었으나, 수원 화성을 끝으로 이후 조선의 축성은 쇠퇴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수원 화성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1975년부터 5년에 걸쳐 "화성성역의궤"라는 축성 기록을 바탕으로 수리 및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21][22] 축성 당시 48개였던 건물 중 41곳이 복원되었으며, 현재 성곽 내부는 시가지화되어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ID 817).

2006년 5월, 복원된 서장대가 방화로 일부 소실되어 재복원되었다.

2022년 3월, 우크라이나 위기가 해결될 때까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는 조명을 한다고 발표했다.[26]

2. 1. 축성 배경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현 화성시 융건릉)으로 옮기면서, 수원을 새로운 정치적, 군사적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노론남인붕당 간의 대립이 극심했고, 정조는 이러한 당쟁을 해소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자 했다.[27] 수원은 서울과 서해, 그리고 중국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정조는 수원을 경제적으로 부강한 자급자족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27] 정조는 백성들을 수원으로 이주시키고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시행했으며, 교육 시설 건립 등 공공사업을 추진하여 수도로서의 기능을 강화했다.[27]

2. 2. 축성 과정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에 착공하여 1796년 10월 10일(음력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2] 팔달산의 채석장에서 채굴한 벽돌로 쌓은 축성 공사에는 다산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2] 정약용조선중국의 성곽 설계를 연구하고 당대 과학을 그의 계획에 통합하였으며, 성곽 건축 재료로 벽돌을 사용하고 효율적인 도르래와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했다.[2]

수원화성 건설에는 70만 시간의 노동력이 소요되었으며, 당시 통화인 과 노동자 급여를 위한 쌀 1500포대가 국고에서 지출되었다.[2] 과거에는 정부 사업이 징용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경우에는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였는데, 이 또한 실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2]

임진왜란 당시 한국 전선의 붕괴에 대한 대응으로, 수원 화성은 성벽, 방어 성곽, 그리고 도시 중심지의 요소들을 포함하도록 건설되었다.[2] 총안이 있는 성벽과 낮은 옹벽을 따라 건설된 화살 발사대는 성곽의 방어 요소였으며, 성벽에는 공격적인 행동을 위한 비밀 통로도 포함되어 있었다.[2]

수원 화성 건설에는 1794년부터 1796년까지 2년이 넘는 기간과 37만 명의 노력이 투입되었다.[2] 성벽의 길이는 5km가 넘으며, 중국에서 전래된 서양 건축 기술을 도입하여 성곽 축조에 돌과 벽돌을 함께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2] 동양과 서양의 기술을 융합한 설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하였다.[2]

2. 3.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정조 서거 직후인 1801년에 발간된 화성 축성 보고서이다.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 전쟁으로 심하게 훼손된 화성을 1970년대에 재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었다.[3]

각 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주제별로 나뉘어 있다.

  • 1권: 청사진, 감독관 명단 등 건설 계획
  • 2~7권: 왕명, 노동자 임금 기록 등 실제 건설 과정
  • 8~10권: 부록 (인접한 행궁 건설 내용)


인력은 전문 분야별(감독, 석공, 노무자 등)로 배치되었으며, 사용된 다양한 자재의 수량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3]

1898년에는 한국 주재 프랑스 영사 앙리 슈발리에(Henry Chevalier)가 요약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발간하였다.[4] 밤베르크 대학교 조두원(Doo Won Cho) 교수의 논문에는 주석이 포함된 독일어 번역본이 제공된다.[5]

2. 4. 한국전쟁과 복원

한국전쟁으로 인해 수원 화성의 성벽과 시설물 일부가 파괴되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21][22] 복원 공사 내역은 다음과 같다.

날짜구역구조물 및 주변 환경합계
1975년-1979년장안문-서장대, 서장대-팔달문, 북수문-창룡문, 장안문-북수문, 창룡문-측면957350000KRW522200000KRW1479550000KRW



현재 성곽 내부는 시가지화되어 있으며, 현대 도로 건설로 인해 일부 구간은 단절되어 있다. 2006년에는 복원된 서장대가 방화로 소실되어 재복원되었다.

지속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11] 2010년에는 남수문이 복원되었다. 남수문의 크기는 길이 29.4m, 너비 5.9m, 높이 9.3m이며, 2012년 6월 9일에 준공되었다.[13]

3. 주요 시설

수원화성 지도


정약용은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수원 화성을 설계했으며, 벽돌과 같은 새로운 건축 재료와 거중기, 유형거 등의 효율적인 장비를 사용하여 2년 반 만에 완공했다.[2] 수원 화성은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벽, 방어 시설, 도시 중심지 기능을 통합하여 건설되었다.[2] 네 개의 주요 성문은 도시의 관문 역할을 했으며, 성벽에는 총안, 화살 발사대, 비밀 통로 등이 설치되어 방어 기능을 강화했다.[2]

수원 화성 건설에는 70만 시간의 노동력이 투입되었고, 국고에서 87만 냥의 비용과 노동자 급여로 쌀 1500포대가 지급되었다.[2] 과거 징용 대신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한 것은 실학 사상의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2]

화성 행궁 성벽


오늘날 수원 화성의 성벽 안쪽은 현대 도로 건설로 인해 넓은 출입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1975년 복원 당시 이 도로들을 보존하면서 세 곳의 출입구(북쪽, 동쪽, 서쪽)에는 성벽길이 인접 구조물 사이를 잇는 다리가 재건축되었다. 팔달산과 관련된 두 개의 작은 지하도(서쪽 옹성 1과 남쪽 옹성 근처)는 보존되었다.

화성성역의궤(1801)에 실린 화성행궁의 모습


현재 존재하지 않는 시설물을 포함하여 성벽을 따라 위치한 48개의 구조물은 다음과 같다.[7]

  • 주요 문(4): 남문(팔달문), 동문(창룡문), 북문(장안문), 서문(화서문)
  • 수문(2): 남수문(남수문), 화홍문(화홍문)
  • 봉수대(1): 봉돈(봉돈)
  • 치(1): 용도(용도)
  • 장대(2): 동장대(동장대), 서장대(서장대)
  • 각루(4): 동남각루(동남각루), 동북각루(동북각루), 서북각루(서북각루), 서남각루(서남각루)
  • 적대(4): 남동적대, 북동적대(북동적대), 북서적대(북서적대), 남서적대
  • 암문(5): 남암문(남암문), 동암문(동암문), 북암문(북암문), 서암문(서암문), 서남암문(서남암문)
  • 공심돈(3): 남공심돈(남공심돈), 동북공심돈(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서북공심돈)
  • 포루(5): 동이포루(East No. 2), 동일포루(동일포루), 동북포루(동북포루), 북포루(북포루), 서포루(서포루)
  • 포루(5): 동포루(동포루), 북동포루(북동포루), 북서포루(북서포루), 서포루(서포루), 남포루(남포루)
  • 노대(2): 동북노대(동북노대), 서노대(서노대)
  • 치(10): 동삼치(동삼치), 동이치(동이치), 동일치(동일치), 북동치(북동치), 서일치(서일치), 서이치(서이치), 서삼치(서삼치), 용도서치(용도서치), 용도동치(용도동치), 남치(남치)


원래 구조물 중 남동적대, 남암문, 남공심돈, 남수문은 재건되지 않았다.[7] 이들은 모두 남문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현대 도로 때문에 재건이 어려웠다.[7]

성벽 구조물은 남문(대중교통 이용 접근 지점)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나열할 수 있다.[8]

# 남문(팔달문)

# 남동적대

# 남암문

# 남공심돈

# 남수문(남수문)

# 동남각루(동남각루)

# 동삼치(동삼치)

# 동이포루(동이포루)

# 봉돈(봉돈)

# 동이치(동이치)

# 동포루(동포루)

# 동일치(동일치)

# 동일포루(동일포루)

# 동문(창룡문)

# 동북노대(동북노대)

# 동북공심돈(동북공심돈)

# 동장대(동장대)

# 동암문(동암문)

# 동북포루(동북포루)

# 북암문(북암문)

# 동북각루(동북각루)

# 화홍문(화홍문)

# 북동포루(북동포루)

# 북동치(북동치)

# 북동적대(북동적대)

# 북문(장안문)

# 북서적대(북서적대)

# 북서포루(북서포루)

# 북포루(북포루)

# 서북공심돈(서북공심돈)

# 서문(화서문)

# 서북각루(서북각루)

# 서일치(서일치)

# 서포루(서포루)

# 서이치(서이치)

# 서노대(서노대)

# 서장대(서장대)

# 서암문(서암문)

# 서포루(서포루)

# 서삼치(서삼치)

# 서남암문(서남암문)

# 용도(용도)

# 용도서치(용도서치)

# 서남각루(서남각루)

# 용도동치(용도동치)

# 남포루(남포루)

# 남치(남치)

# 남서적대

수원 화성의 주요 시설물에 대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

  • '''수문:''' 화홍문(북수문)과 남수문
  • '''망루:''' 3층 구조의 망루 2개 (꼭대기에 독특한 목조 정자와 총안, 감시 초소)
  • '''봉수대:''' 봉돈 (5개의 굴뚝을 이용해 연기나 불로 다양한 신호)

3. 1. 4대 성문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장안문(북문), 화서문(서문), 팔달문(남문), 창룡문(동문)의 4개의 성문이 있다.[7] 1795년에 건설된 이 문들은 각각 서울의 숭례문과 유사한 지붕 디자인, 돌, 목재 세공을 갖추고 있으며 규모가 크다. 북문과 남문은 2층 목조 누각으로, 서문과 동문은 1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각 문 주변에는 경비병이 배치된 소규모 요새가 있었다. 한국 전쟁 중 창룡문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8년에 복원되었다.[7]

오늘날 수원 화성은 현대 도로 건설로 인해 성벽 일부 구간이 단절되었다. 1975년 복원 당시 이러한 도로들을 보존하면서, 세 곳의 출입구(북쪽, 동쪽, 서쪽)에는 성벽길이 인접 구조물 사이를 잇는 다리가 재건축되었다. 남쪽 출입구의 경우, 남서쪽과 남동쪽 문루, 남쪽 암문, 남쪽 누각 등은 재건되지 않았고, 현재 팔달문(남문)은 교통 흐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7]

3. 1. 1. 장안문 (북문)

수원 화성 장안문


장안문(長安門)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 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 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 개의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7]

1795년에 건설된 장안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숭례문과 지붕 디자인, 돌, 목재 세공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북문은 2층 목조 누각으로 덮여 있으며, 경비병이 배치되었던 소규모 요새들로 둘러싸여 있다.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1970년대에 재건되었다.[7]

장안문 안에서 바라본 모습

3. 1. 2. 팔달문 (남문)

팔달문


팔달문(八達門)은 수원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흥인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6]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팔달문은 한국 전쟁 중 피해를 입지 않아 성벽 주변의 다른 건축물들처럼 대대적인 재건을 거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부 서까래가 심하게 처지게 되었고, 2010년 9월부터 문의 지붕을 완전히 해체하여 수리하고 다시 조립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11]

팔달문에는 팔달문 동종(Paldalmun Dongjong)이라는 종이 있는데, 원래는 1080년 개성에서 주조되었으며, 1687년 만의사(Manuisa Temple)의 주지 도화승(Dohwaseung)에 의해 불교 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다시 주조되었다. 높이 123cm, 지름 75cm이며, 용 모양의 현수 링에 매달려 있으며, 음색을 조절하는 관(flue pipe)이 있고, 약간 굽은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한국 종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특히 이 종의 관에는 용의 꼬리가 감싸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종의 윗부분에는 산스크리트어가 새겨져 있으며, 아랫부분은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장식용 젖꼭지 모양 사이에는 연꽃을 든 보살상이 있다. 이 종은 디자인이 통도사의 종과 매우 유사하며, 크기만 다를 뿐이다.[10]

남쪽면과 옹성(교통 없이 보임)


저녁의 동쪽면

3. 1. 3. 창룡문 (동문)

창룡문(蒼龍門)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푸를 '창(蒼)' 자가 동쪽을 의미하는 것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때 크게 소실되어 1978년에 복원되었다. 홍예의 크기만 놓고 보면 장안문보다 크다. 서남쪽으로 화성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이고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이며,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머리는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각 17척이고, 양쪽 선문 안에는 쇠로 빗장을 설치하였다. 동쪽에 있는 옹성(甕城)은 동옹문이라고도 불린다.[6]

창룡문은 주요 도로 교차로에 있으며, 돌로 된 기단 위에 1층 목조 누각이 세워져 있다. 한국 전쟁 때 파괴되었으나 1975년에 재건되었다.

외부에서 본 모습

3. 1. 4. 화서문 (서문)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수원 화성의 서문으로, 창룡문과 구조가 같다.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지만, 좌우 돌 계단이 꺾여 층을 이루는 점이 다르다. 안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9척, 바깥쪽은 22척 2촌이다. 홍예문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각 18척이며, 수문청은 문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팎 모두 평평한 여장이 설치되었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와 활 쏘는 구멍 6개가 뚫려 있다.[7]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서북공심돈이 화서문 옆에 있다.

3. 2. 수문

수원 화성에는 수원천의 흐름을 조절하고 방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화홍문(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설치되었다.

  • '''화홍문''': 수원천이 성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곳에 설치된 북쪽 수문이다.
  • '''남수문''': 수원천이 성 밖으로 흘러 나가는 곳에 설치된 남쪽 수문으로, 화홍문에서 1km 조금 넘는 하류에 위치한다. 길이 29.4m, 너비 5.9m, 높이 9.3m이며, 9개의 아치형 수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華城중국어 남쪽에 위치하며, 다리 위에는 개울을 내려다보는 큰 벽돌 구조물이 세워졌다. 이 방어 구조물은 아치 위 전체 높이의 3분의 2를 차지하며, 나머지 3분의 1은 다리가 차지한다. 화홍문에는 이와 유사한 구조물이 없고 대신 낮은 돌담과 목조 문루로 지켜진다. 1794년 2월 28일 착공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795년 11월에 재개되어 1796년 3월 25일 완공되었으나,[28] 기본 구조는 1월 16일에 완성되어 당시부터 사용되었다. 1846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가 곧 복구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22년 홍수로 다시 유실되었다.[12] 1975년 화성 복원 공사 당시 재건 방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향후 복원을 위해 예비 지역으로 남겨졌다가, 2006년 화성 내외부 수원천 정비 사업과 함께 재건 문제가 제기되어[12] 2010년 6월 재건축 공사가 시작, 2012년에 완료되었다.[13]

3. 2. 1. 화홍문 (북수문)

화홍문


화홍문 외측과 방화수류정(좌)


화홍문(華虹門)은 화성의 북수문으로, 수원천이 성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곳에 설치되었다. 1794년(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上樑)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1795년(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세웠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 잘 어우러져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불리는 수원 8경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 기능하며,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銃眼)과 포혈(砲穴)을 갖추었다.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화홍문은 수원천이 화성으로 흘러들어가 남수문(南水門)을 통해 나가는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다리 역할과 더불어 방어를 위한 대포도 설치되어 있었다.

3. 2. 2. 남수문

1794년(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했다가, 이듬해 11월까지 공사를 중단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정조 20년) 1월 16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28]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鐵箭)을 설치하여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제도와 같았다. 9개의 홍예문 위에는 통로를 만들고 여장을 높이 쌓았는데, 돌기둥 8개가 돌다리를 떠받들게 되어 있다. 또한 장포(長舖)라는 전돌로 만든 긴 포를 설치했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로 해서, 이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많은 포혈을 설치하여 군사시설로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28]

1846년 대홍수로 인해 원래의 남수문이 유실되었다. 곧 복구되었지만 일제강점기1922년 홍수로 다시 유실되었다.[12] 1975년 수원 화성의 전반적인 복원 공사 당시 문의 재건 방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향후 복원을 위해 예비 지역으로 남겨졌다. 2006년 화성 내외의 수원천 전체 정비 사업이 시작되면서 다시 문제가 제기되었다.[12] 마침내 2010년 6월에 재건축 공사가 시작되어 2012년에 완료되었다.[13] 복원된 남수문은 길이 29.4m, 너비 5.9m, 높이 9.3m이다. 수문 아래쪽은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이고 수문 위쪽은 전등을 이용해 원형 복원됐다.[28]

남수문

3. 3. 장대와 노대

장대는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으로,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3. 3. 1. 서장대 (화성장대)와 서노대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군사 지휘 본부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정조가 직접 쓴 '화성장대' 편액이 걸려 있으며, 성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29][30] 1794년(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하여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2층 지붕 건물이다.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건물을 세웠다.

서장대(화성장대)


서장대 주간 경관


서장대 바로 뒤에는 서노대(西弩臺)가 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서노대


선옹대에서 바라본 서장대


서장대는 1996년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으나, 2006년 5월 1일 방화범의 공격을 다시 받았다. 방화범은 라이터로 자신의 옷과 속옷에 불을 붙여 화재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 화재로 약 60억 (약 600만달러)의 피해가 발생하여, 망루의 상층부가 파괴되었다. 서장대는 2007년에 재건되었다.

3. 3. 2. 동장대 (연무대)

동장대는 수원 화성의 동쪽에 있는 군사 훈련 시설로,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한다. 1795년(정조) 7월 15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에 완공되었다.[7] '연무대'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동장대(연무대)


이곳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솟아 있어, 성 안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으며, 3층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사격하기 편리하게 되어 있다. 가운데에는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하여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훈련장(조련장)이 조성되어 있었다.[7]

동장대 근처에는 동북노대가 위치해 있다.[7]

3. 4. 공심돈

공심돈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지은 망루와 같은 시설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되어 있지만, 성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수원 화성이 처음이다.[6] 중국 병서인 '성서'(城書)는 공심돈에 대해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원 화성에는 서북공심돈, 동북공심돈, 남공심돈(미복원) 세 곳의 공심돈이 설치되었다.

3. 4. 1.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쪽 치(雉) 위에 있는 시설물로, 1796년(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되었다.[6] 2011년 3월 3일 보물 제1710호로 지정되었다.[6]

성곽, 전축, 누각은 모두 축조 당시의 원형(完形)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6] 치의 높이는 4.25m이며, 서북쪽 두 면에는 각각 현안(懸眼)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6]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았으며, 그 속은 비어 있다.[6] 벽축의 높이는 5.58m이고, 아래쪽 네모난 넓이는 7.13m, 위쪽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는 6.51m이다.[6] 내부는 3층 구조로, 2층과 3층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게 하였다.[6] 돈대 꼭대기에는 포사(砲舍)가 설치되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이, 상층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이 뚫려 있다.[6]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만들었다.[6] 서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6]

남서쪽에서 본 모습


의궤 그림

3. 4. 2.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 안쪽에 지어졌다. 원형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높이는 약 5.18m, 바깥 원 둘레는 약 37.19m, 벽돌 부분 두께는 약 1.22m, 안쪽 원 둘레는 약 21.64m이다. 내원과 외원 사이에는 약 1.22m의 공간을 비워두고, 안에는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여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층 높이는 약 2.13m, 가운데 층 높이는 약 1.83m로, 모두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하였다. 아래층 공심에서 나선형 벽돌 계단으로 위층에 오를 수 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6]

동쪽에서 본 모습


남서쪽에서 본 모습


성벽 밖에서 본 모습


의궤 그림

3. 4. 3. 남공심돈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 동쪽의 치(雉) 위에 있는 공심돈으로, 1795년(정조 19년) 10월 18일에 완공되었다.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6]

3. 5. 암문

암문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한 비밀 통로로, 사람이나 가축, 군수품을 조달하는 데 사용되었다. 수원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 5개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 중 남암문은 시가지화로 인해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7]

동암문


북암문


북암문 외측 야간

  • 동암문(東暗門): 동북포루와 동장대 사이에 위치한다. 성벽 안쪽으로 굽어져 들어간 형태로, 1796년(정조 20년) 3월 25일에 홍예가 완성되었다.
  • 북암문(北暗門): 방화수류정 근처의 골짜기진 곳에 있어 밖에서 찾기 어렵다. 1795년(정조 19년) 2월 23일에 홍예가 완성되었다.
  • 서암문(西暗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으며, 입구가 꺾여 있어 찾기 힘들다. 안쪽은 높고 바깥쪽은 낮아 계단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위치이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져 설치되었다. 1796년(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완성되었다.
  • 남암문(南暗門): 남공심돈 근처에 있었으나, 현재는 미복원 상태이다.
  •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각루로 나가는 통로이며,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鋪舍)가 설치되어 군인들이 감시와 경고를 할 수 있었다.


서남암문을 제외한 나머지 암문들은 성벽 안쪽에 위치하며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3. 6. 각루

각루는 성곽의 높은 곳에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다기능 건축물이다. 수원 화성에는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남각루(화양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었다.[6] 각 각루에 대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름별칭위치완공일설명
동북각루방화수류정화홍문 옆, 용연 위1794년(정조 18년) 10월 19일제2의 전투 지휘소였으나, 아름다운 경치로 연회 장소로 더 많이 이용됨. 2011년 3월 3일 보물 제1709호로 지정.
서북각루화서문 옆1796년(정조 20년) 7월 9일숙지산을 마주보고 있으며, 1층에 온돌 설치.
동남각루남수문 옆1796년(정조 20년) 7월 25일높은 곳에 위치하여 주위 관찰 용이.
서남각루화양루서남암문에서 용도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 끝1796년(정조 20년) 7월 20일수원역을 포함한 도시의 넓은 전망을 볼 수 있음.


3. 6. 1. 동북각루 (방화수류정)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7일에 상량하였고, 10월 19일에 완공되었다.[6] 2011년 3월 3일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다.

방화수류정


원래는 제2의 전투 지휘소로 계획되었으나,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연회 장소로 더 많이 이용되었다.[6]

방화수류정 근접 사진


용연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


화홍문에서 수 미터 아래쪽 용연의 유출부


방화수류정 평면 사진


방화수류정 성벽 근접 사진


방화수류정 의궤 사진

3. 6. 2. 서북각루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는 각루로,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정조 20년) 7월 9일에 완공되었다.[6] 숙지산(肅芝山)을 마주보고 있으며, 화서문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로 이어지는 초소이다. 공심돈보다는 낮고, 1층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서북각루


성벽 밖에서 본 모습


서북각루에서 본 풍경


내부 모습


의궤 그림

3. 6. 3. 동남각루

각루는 성곽에서 높은 곳에 누각처럼 지은 건물로,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다기능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있다.

동남각루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 높은 곳에 위치한다. 성벽이 꺾인 모퉁이에 있어 주위를 관찰하기 쉽다. 1796년(정조 20년) 7월 25일에 완공되었다.[6][7][8][9]

3. 6. 4. 서남각루 (화양루)

서남각루는 서장대와 팔달문 중간 지점, 서남암문에서 용도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 끝에 있으며, '화양루(華陽樓)'라고도 불린다.[6] 1796년(정조) 4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7월 13일에 상량하고, 7월 20일에 누각을 준공하였다. 서남각루는 용도 끝에 있어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7]

서남각루


오늘날 서남각루에서는 수원역을 포함한 도시의 광활한 전망을 볼 수 있다.

서남각루 바닥


의궤 그림

3. 7. 봉돈

봉돈


저녁 봉돈의 모습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고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甓城)에는 총안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 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3. 8. 포루와 포루

포루(砲樓)는 화포를 설치하기 위해 벽돌로 지은 시설물이다. 수원 화성에는 다음과 같은 5개의 포루가 있다.

수원 화성의 포루(砲樓)
이름위치완공일설명
동포루(東砲樓)동쪽, 두 개의 동쪽 옹성 사이1796년 7월 16일내부는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각도에서 화기 및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북동포루(北東砲樓)북문(장안문)과 화홍문(북수문) 사이1794년 9월 23일성곽의 북동쪽 외곽을 통제하고, 화홍문을 보호한다.
북서포루(北西砲樓)북서적대에 인접1794년 9월 24일검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내부는 판자로 3층으로 나뉘어 있다. 각 층에는 화기가 비축되어 있다. 지붕은 내측(성벽 쪽)은 박공지붕이고 외측(성벽 반대쪽)은 경사진 독특한 디자인이다.
서포루(西砲樓)화서문에서 서장대 방향, 팔달산 중턱1796년 5월 30일팔달산 외곽을 방어하고 서장대를 보호하며, 화성에서 가장 무장이 강력했던 포루 중 하나이다.
남포루(南砲樓)수구문과 남장대 사이팔달문 부근의 성곽 외곽을 방어한다.



포루(舖樓)는 보병이 은폐하여 적을 공격하기 위해 치성 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다. 수원 화성에는 다음과 같은 5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수원 화성의 포루(舖樓)
이름위치완공일설명
동북포루(東北舖樓)북쪽과 동쪽의 비밀문 사이주변을 보호한다.
동일포루(東一舖樓)1796년 7월 10일성벽에서 더 멀리 확장되어 있다.
동이포루(東二舖樓)1796년 7월 3일봉수대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성벽에서 더 멀리 돌출되어 있고, 나무로 된 정문이 없다.
북포루(北舖樓)장안문보다 화서문에 더 가까움1795년 2월 20일숨겨진 화기를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 건물 북쪽에 관광 안내소와 공중화장실이 있다.
서포루(西舖樓)성벽에서 140m 돌출된 위치1796년 8월 18일서쪽 비밀문을 통제 및 보호한다.


3. 9. 치

치는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방어 시설물이다. 꿩이 자기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는 것을 잘한다는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6] 치는 적으로 하여금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동이치


화성에는 다음과 같이 10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다.[7]

이름위치설명
동삼치(東三稚)동쪽남동각에서 동이포루 사이
동이치(東二稚)동쪽바깥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됨
동일치(東一稚)동쪽봉수대에서 148m 지점
북동치(北東稚)북동쪽북동문 수문장대 동쪽
서일치(西一稚)서쪽
서이치(西二稚)서쪽서노대 아래
서삼치(西三稚)서쪽남서쪽 돌출부 북쪽
용도서치(용도서치)남서쪽용도 서쪽, 서호 방향
용도동치(용도동치)남서쪽용도 동쪽, 팔달문 방향
남치(南稚)남쪽팔달산 중턱, 남포루 아래


3. 10. 적대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 시설이다.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설치되었으나, 현재는 장안문 좌우의 북서적대와 북동적대만 남아 있다.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시가지화로 인해 미복원 상태이다.[7]

  • 북동적대(北東敵臺): 현안과 총안을 두어 성문과 응가성을 방어하던 곳이다.
  • 북서적대(北西敵臺): 장안문의 좌우에 설치되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 남서적대(南西敵臺): 팔달문 옆 팔달산쪽에 있었는데 도시화로 복원되지 않았다.
  • 남동적대(南東敵臺): 남수문에서 팔달문 사이에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았다.

4. 기타 시설

여민각은 화성 중심부에 있는 종각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2008년 복원되었다. 여민각이라는 이름은 시민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붙여졌다. 매년 12월 31일 밤에는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타종 행사가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31]

성신사


성신사는 수원 화성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효원의 종각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수원시가 1991년에 만들었다.

4. 1. 화성행궁

행궁은 수원 화성 내부에 위치한 궁궐로, 2007년 6월 8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27]

행궁(行宮)은 '임시 거처'라는 뜻으로, 정조가 서울의 궁궐을 떠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할 때 머물기 위해 화성 성곽 안에 지어진 궁궐이다. 정조가 거주하지 않을 때는 그의 대리 관리가 정부의 근거지로 사용했다. 행궁은 또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60세 생일잔치, 노인들의 잔치, 그리고 국가시험에도 사용되었다.

이 궁궐은 1789년에 건립되었지만, 1794년에서 1796년 사이에 600칸의 건물을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고, 이로써 한국에서 가장 큰 행궁이 되었다.

행궁은 팔달산 동쪽 기슭에 약 직사각형 형태로 배치된 22개의 건물(노비들의 거처 제외)로 구성되어 있다. 도심 중앙에서 궁궐로 들어가는 정문은 신풍루(新風樓)인데, 1790년 건립 당시에는 진남루(鎭南樓)로 불렸으나 정조의 명에 따라 5년 후 이름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때 낭남헌(狼南軒)을 제외한 대부분의 궁궐이 파괴되었다. 1996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10월에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행궁 정문 밖에는 3층짜리 관광 안내 센터와 전시관, 그리고 3D 극장이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한다.

4. 2. 여민각

여민각은 화성 중심부에 있는 종각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2008년 복원됐다. 이름은 시민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붙였다. 매년 12월 31일 밤에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타종 행사가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31]

4. 3. 성신사



성신사는 수원 화성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4. 4. 효원의 종각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수원시가 1991년에 만들었다.

5. 문화 행사

화성에서는 여러 공연과 축제가 열린다. 대부분의 공연은 화성행궁 앞 광장에서 열린다.

수원화성문화제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수원시의 대표적인 축제이다. 그 외에도 정조 시대의 군사 훈련 방식인 24반 무예 시범 공연과 왕실 근위병들의 의식 재현 행사인 장용영 수위 의식이 매주 열린다.

5. 1. 수원화성문화제

수원화성문화제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수원시의 대표적인 축제이다. 3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다양한 전통 공연이 펼쳐진다.[1]

5. 2. 기타 공연 및 행사

화성행궁 앞 광장에서는 3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다양한 전통 공연이 펼쳐진다.[1]

정조 시대의 군사 훈련 방식인 24반 무예 시범 공연이 매일(월요일 제외) 진행된다.[1] 24반 무예는 정조의 명에 따라 백동수, 이덕무, 박제가가 1790년에 편찬한 것이다.[1] 이들이 무예 교육을 위해 만든 교본은 조선 시대 무예들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1] 이 무예들은 장용영의 감독 하에 화성의 군사들에 의해 수련되었다.[1] 시연은 3월부터 11월까지 매일 오전 11시(월요일 제외)에 진행되며, 12월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시행된다.[1]

무예24기 기창 시범


무예24기 월도 시범


무예24기 시범


왕실 근위병들의 의식 재현 행사인 장용영 수위 의식이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3월부터 11월까지 열린다.[1] 이 의식은 1790년대 화성에서 훈련도감 소속 근위병들이 거행했던 의식을 재현한 것이다.[1] 당시 한국 최대 규모의 군영에는 1만 2천 명의 근위병이 주둔하고 있었다.[1] 정조가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는 능을 조성한 후, 이 군영의 병사들을 새로 조성된 능을 지키도록 배치했다.[1] 1793년 수원부의 이름을 화성으로 바꾼 후, 장용영에 소속된 군영이 성벽 안에 건설되었다.[1]

6. 1795년 8일간의 행차

정조는 1795년 윤2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수원 화성으로 8일간의 행차를 거행했다. 이 행차는 사도세자의 60주기(환갑)를 기념하는 의미도 있었다. 1795년의 행차는 5,661명과 1,417마리의 말이 참여한 대규모 행사였다.[16]

이러한 궁중 행사는 규장각에 기록되었는데, "원행을묘정리의궤"(을묘=1795)가 그 결과물이다. 이 의궤의 주본은 8폭 병풍인 '화성행행도 병풍'이다. 현재 세 종류의 병풍이 전해지는데, 세피아톤 병풍,[17] 청색 병풍,[18] 왕의 사용을 위해 제작된 채색 병풍[19]이 있다. 채색 병풍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으며, 2005년 4월 15일 국보 제1430호로 지정되었다.[19]

그림들은 행차의 중요한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병풍의 순서는 실제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20]


  • 1795년 2월 11일: 화성 왕릉 참배, 특별 문무과 시험
  • 1795년 2월 13일: 봉수당에서 열린 국왕 어머니를 위한 연회
  • 1795년 2월 14일: 낙남정에서 열린 원로들을 위한 잔치, 득중정에서 국왕의 활쏘기
  • 1795년 2월 12일: 서장대 야간 군사 훈련
  • 1795년 2월 15일: 별궁으로 돌아오는 행렬
  • 1795년 2월 16일: 노량진에서 뗏목 다리를 건너 한강을 건너는 행렬


봉수당 연회 장면은 당시 그림의 전통적인 구성을 따랐지만, 왕궁으로 돌아오는 행렬은 ‘之’자 형태로, 궁중 화가 김홍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뗏목 다리로 한강을 건너는 행렬은 당시 왕실 행렬 그림에서는 드문 독특한 구성이다.[19]

궁중 기록에 따르면, 혜경궁 홍씨는 병풍의 웅장함과 정밀함에 기뻐하며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에게 상을 내렸다. 그 화가들은 최득현, 김덕신, 이명규, 장한종(1768-1815), 윤석근, 허식(1762-?), 이인문이었다.[20]

능묘 참배
화성성묘전배


과거 시험
낙남헌방방


연회
봉수당진찬


원로 연회
낙남헌양로연


서장대 야조
서장대야조


활쏘기
득중정어사


행렬
환어행렬


강 건너기
한강주교환어

참조

[1] 웹사이트 Hwaseong Fortress (Summary) http://jikimi.cha.go[...] 2013-04-25
[2] 논문 1997
[3] 웹사이트 Hwaseong Fortress (Description) http://jikimi.cha.go[...] 2016-01-13
[4] 논문 1898
[5] 논문 2010
[6] 논문 2006
[7] 논문 2010
[8] 웹사이트 Hwaseong Fortress http://www.theseoulg[...] 2013-04-25
[9] 웹사이트 Hwaseong Fortress http://www.orientala[...] 2013-04-25
[10] 웹사이트 Paldalmundongjong https://web.archive.[...] 2012-02-16
[11] 웹사이트 Disassemble and Repair Project of Paldalmun starts in September https://archive.toda[...] 2010-09-17
[12] 웹사이트 Realization of Ecological Suwon Stream https://archive.toda[...] 2013-07-03
[13] 웹사이트 Floodgate of Hwaseong Fortress Restored https://web.archive.[...] 2016-03-04
[14] 웹사이트 좌익문 https://terms.naver.[...]
[15] 웹사이트 네이버 지도 http://map.naver.com[...]
[16] 웹사이트 Performance Information https://web.archive.[...] 2010-05-29
[17] 웹사이트 Hwaseong Haenghaeng https://archive.toda[...] Korean Copyright Commission 2013-07-03
[18] 웹사이트 Kim Deuksin Hwaseongneunghaengdo https://web.archive.[...] Korean Copyright Commission 2016-04-10
[19] 웹사이트 Royal Parade to Hwaseong Fortress http://jikimi.cha.go[...]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2013-05-08
[20] 웹사이트 Royal Procession to the Ancestral Tomb in Hwasong http://leeum.samsung[...] Samsung Foundation 2013-05-08
[21] 서적 Bericht der Restaurierungsarbeit für die Suwon-Festung, Suwonseong Bokwonjeonghwaji Provinz Gyeonggido 1980
[22] 논문 2010
[23] 뉴스 Renaissance of Joseon King Jeongjo https://www.koreatim[...] 2012-02-24
[24] 논문 1996
[25] 웹사이트 Hwaseong Fortress Tourist Trolley (화성어차) http://english.visit[...]
[26] 뉴스 경기 수원시, 수원화성에서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퍼포먼스 https://www.ytn.co.k[...] 2022-03-08
[27] 기타
[28] 뉴스 수원 '남수문' 90년 만에 복원..첨단공법 가미 https://web.archive.[...] 아시아경제 2021-07-12
[29] 간행물 세종 3년 상왕 태종의 한양도성 개축의 정치사적 의미 https://history.seou[...] 서울역사편찬원 2013-02
[30] 웹사이트 (4) 세종과 그 이후의 도성건설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021-10-11
[31] 뉴스 수원화성 ‘화성행궁’·‘여민각’ https://web.archive.[...] 수원일보 20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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